검증 진행 중
이 이야기의 사실관계는 전기와 연구 자료로 확인했지만, 1차 사료 대조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래 출처를 함께 확인해 주세요.
기록에서
디에고 리베라
1886–1957 · 1939–1954년 · 멕시코시티
두 채와 다리 하나
1934년 멕시코시티 산앙헬에 집 두 채가 지어졌습니다. 큰 것은 디에고 리베라의 것, 작은 것은 프리다 칼로의 것이었습니다. 색도 달랐고 크기도 달랐습니다. 두 집은 옥상의 다리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각자의 작업실을 갖되 건너갈 수 있게 한 구조였습니다. 리베라와 프리다 둘 다 그 방식을 원했습니다.
그 무렵 이미 관계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리베라는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관계를 가졌고, 프리다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머리를 자르고 남자 옷을 입은 자화상을 그린 것이 그 무렵입니다.
1939년, 이혼
1939년 11월 리베라와 프리다는 이혼했습니다. 프리다는 아버지 집이 있던 코요아칸의 푸른 집으로 돌아갔고, 산앙헬의 다리는 건너는 사람 없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끊기지가 않았습니다. 리베라와 프리다는 같은 화단에 속해 있었고 같은 사람들과 일했습니다. 벽화 주문과 전시가 서로 얽혀 있었습니다.
리베라는 프리다의 병원비를 계속 냈습니다. 프리다는 리베라의 일을 계속 도왔고 그가 부탁한 편지를 대신 썼습니다. 이혼 서류가 바꾼 것은 서류뿐이었습니다.
일 년 뒤 다시
1940년 12월 리베라와 프리다는 다시 혼인했습니다. 프리다가 조건을 걸었다고 전합니다. 생활비를 각자 대고, 서로의 작업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산 뒤에도 두 사람은 각자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리베라는 산앙헬에, 프리다는 코요아칸에 있었습니다. 오가는 사이였지 함께 사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리베라의 관계들은 그 뒤로도 이어졌습니다. 프리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사람 다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954년
프리다 칼로는 1954년 마흔일곱에 죽었습니다. 리베라는 그날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이라고 적었고, 자기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너무 늦게 알았다고 썼습니다.
그는 프리다의 푸른 집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국가에 넘겼습니다. 그 집은 지금 프리다 칼로 박물관입니다.
리베라는 삼 년 뒤에 죽었습니다. 유언에 프리다와 함께 묻어달라고 적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고, 그는 국가가 정한 자리에 묻혔습니다. 두 사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했나
- —각자의 집을 짓고 다리로 이어 두었다.
- —이혼한 뒤에도 서로의 일과 병원비를 계속 책임졌다.
- —일 년 뒤 조건을 새로 정해 다시 혼인했다.
프리다 칼로는 1954년에, 디에고 리베라는 195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리베라는 회고록에서 프리다를 잃은 날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로 적었습니다.
기록이 말해주는 것
- 확인됨두 사람은 1934년 산앙헬에 다리로 이어진 집 두 채를 지어 각각 살았습니다.(Encyclopædia Britannica — Diego Rivera)
- 확인됨1939년 11월 이혼했고 1940년 12월 다시 혼인했습니다.(Encyclopædia Britannica — Diego Rivera)
- 확인됨재혼 뒤에도 두 사람은 각자의 집에서 지냈습니다.(Encyclopædia Britannica — Diego Rivera)
- 확인됨프리다는 1954년에, 리베라는 195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Encyclopædia Britannica — Diego Rivera)
- 확인됨리베라는 프리다의 집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국가에 넘겼습니다.(Encyclopædia Britannica — Diego Rivera)
기록이 말하지 않는 것
- 미상재혼 당시 조건이 실제로 어떻게 합의되었는지는 전언에 따라 다릅니다.
- 미상두 사람이 이 관계 방식을 각각 어떻게 여겼는지는 남긴 글이 서로 다릅니다.
기록이 없는 부분은 채우지 않습니다. 인용이나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 한, 이 사람이 무엇을 느꼈는지는 쓰지 않습니다.
출처
- 2차 · Encyclopædia Britannica — Diego Rivera · 전기적 사실 확인에만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