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 진행 중
이 이야기의 사실관계는 전기와 연구 자료로 확인했지만, 1차 사료 대조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래 출처를 함께 확인해 주세요.
기록에서
엘로이즈
12세기 초 · 파리
파리, 1115년 무렵
피에르 아벨라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논리학자였습니다. 그가 강의하는 곳에는 학생이 수천 명씩 모였다고 전합니다. 서른 중반이었고, 자기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로이즈는 노트르담 참사회원 퓔베르의 조카였습니다. 스물 안팎이었습니다. 라틴어를 자유롭게 읽고 썼고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도 익혔습니다. 그 시절 여성으로서는 물론이고 남성 학자들 사이에서도 드문 수준이었습니다. 파리에서 그의 학식은 이미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아벨라르는 퓔베르에게 청해 그 집에 하숙하며 엘로이즈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났습니다.
훗날 아벨라르는 자기 글에서, 그 집에 들어간 것이 처음부터 계획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엘로이즈는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엘로이즈가 임신했습니다. 아벨라르는 그를 자기 누이 집으로 보냈고, 그곳에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아스트랄라베였습니다. 별의 위치를 재는 기구의 이름입니다.
퓔베르가 알게 되자 아벨라르는 결혼하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비밀로 하자는 조건이었습니다. 성직자의 결혼이 알려지면 그의 경력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로이즈가 반대했습니다. 결혼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결혼은 당신을 망칠 것이다. 철학자에게 아내와 아이와 살림은 방해가 될 뿐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라고 불리는 것보다 당신의 여자라고 불리는 편이 낫고, 황후가 되느니 당신의 창녀로 불리는 편이 낫다고. 묶여서 주는 것보다 값없이 주는 사랑이 더 크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벨라르는 듣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퓔베르는 그 결혼을 공개하려 했고,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수녀원에 숨겼습니다. 퓔베르는 그가 조카를 버리려 한다고 여겼습니다.
어느 밤 퓔베르가 보낸 사람들이 아벨라르가 자던 방에 들어가 그를 거세했습니다.
그 뒤 두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벨라르는 생드니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들어가기 전에 엘로이즈에게 먼저 수녀가 되라고 했습니다. 자기보다 먼저 서원하게 했습니다.
엘로이즈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그는 스물 몇 살이었고, 신앙 때문이 아니라 그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나중에 직접 적었습니다.
십 년 뒤의 편지
여러 해가 지난 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긴 편지를 우연히 읽게 됩니다. 자기가 겪은 재난을 정리한 글이었고, 거기에 두 사람의 일이 적혀 있었습니다.
엘로이즈는 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는 감추지 않습니다. 자신은 여전히 그때를 잊지 못하며, 미사를 드리는 중에도 그 기억이 떠오른다고 씁니다. 자신은 회개하지 않았고 다만 회개하는 척하고 있을 뿐이라고 씁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경건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라고 씁니다.
아벨라르의 답장은 결이 다릅니다. 그는 영혼의 지도자가 제자에게 쓰는 어조로 답합니다. 지난 일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고, 기도를 권합니다. 그 온도 차는 편지를 나란히 놓고 읽으면 분명합니다.
엘로이즈는 그 뒤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수녀원 운영에 관한 실무적인 질문들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규칙을 어떻게 정할지, 여성 수도원에는 무엇이 맞는지 같은 것들입니다.
같은 자리에
아벨라르가 세운 파라클레 수도원을 그가 엘로이즈에게 넘겼습니다. 엘로이즈는 그곳의 원장이 되어 삼십 년 넘게 그 공동체를 이끌었습니다. 유능한 운영자였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1142년 아벨라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엘로이즈는 그의 시신을 파라클레로 옮겨 오게 했습니다.
1164년 그도 세상을 떠났고, 그 곁에 묻혔습니다. 살아서 함께 있지 못한 시간이 사십 년이 넘습니다.
두 사람의 유해는 여러 번 옮겨졌고, 1817년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로 갔습니다.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이 수십 년에 걸쳐 주고받은 편지는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서한 문학으로 남았습니다. 개인적인 사랑의 기록이 철학과 종교, 문학의 역사로 이어진 드문 경우입니다.
함께 살지 못한 사랑이 900년 뒤의 사람에게까지 읽히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남긴 것은 관계가 아니라 문장이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했나
-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관계를 멈추지 않았다.
- —일이 벌어진 뒤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 —수십 년 뒤 먼저 편지를 써서 자신의 마음을 밝혔다.
두 사람은 다시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고, 그 편지들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기록이 말해주는 것
- 확인됨두 사람의 관계, 비밀 결혼, 그리고 이후 각자 수도원으로 들어간 사실.(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
- 확인됨수십 년 뒤 오간 편지들이 남아 있고, 엘로이즈가 자신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쓴 대목이 그 안에 있습니다.(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
기록이 말하지 않는 것
- 미상편지들의 저자와 진위를 두고는 오랜 학술 논쟁이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두 사람이 직접 쓴 것인지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 미상엘로이즈가 수도원에서 보낸 오랜 시간 동안 실제로 무엇을 느꼈는지는 편지에 적힌 것 너머로는 알 수 없습니다.
- 미상이 이야기에는 널리 인용되는 문장이 여럿 있지만, 판본에 따라 번역이 크게 갈립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직접 인용을 넣지 않았습니다.
기록이 없는 부분은 채우지 않습니다. 인용이나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 한, 이 사람이 무엇을 느꼈는지는 쓰지 않습니다.
출처
- 1차 ·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 · 판본에 따라 번역 차이가 큽니다. 직접 인용은 넣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