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 진행 중
이 이야기의 사실관계는 전기와 연구 자료로 확인했지만, 1차 사료 대조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래 출처를 함께 확인해 주세요.
기록에서
마리 퀴리
1867–1934 · 1894–1906년 · 파리
폴란드에서 온 사람
마리 스크워도프스카는 폴란드에서 왔습니다. 그곳에서는 여자가 대학에 갈 수 없어서, 언니의 학비를 먼저 대주고 자기 차례를 기다린 끝에 스물넷에 파리로 왔습니다.
다락방에 살면서 소르본을 다녔습니다. 겨울에는 물이 얼었고, 가진 옷을 다 덮고 잤습니다. 굶다가 쓰러진 적도 있었습니다. 삼 년 만에 물리학과 수학 학위를 받았습니다.
1894년, 실험할 자리가 마땅치 않아 알아보던 중 아는 사람의 소개로 피에르 퀴리를 만났습니다. 그에게는 실험실이 있었습니다.
서른다섯의 피에르는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은 자기 같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젊을 때 적어둔 적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실험실을 같이 쓰면서 매일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마리는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마리의 계획은 학위를 마치고 폴란드로 돌아가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고, 폴란드어로 가르치는 것조차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마리에게 그것은 개인의 진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피에르가 청혼했을 때 마리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해 여름 마리는 폴란드로 돌아갔습니다.
피에르는 편지를 계속 보냈습니다. 함께 연구하자고 썼고, 필요하다면 자신이 폴란드로 가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살겠다는 뜻까지 밝혔습니다. 파리에서 쌓아 온 것을 두고 가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마리는 폴란드에서 자리를 구해 보려 했지만 여자에게 열린 자리가 없었습니다.
1895년
마리는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그해 7월 두 사람은 혼인했습니다.
예식은 아주 간소했습니다. 성당에도 가지 않았고 반지도 없었습니다. 마리는 흰 드레스 대신 짙은 남색 옷을 입었습니다. 실험실에서 그대로 입을 수 있는 옷을 고른 것이고, 실제로 그 뒤 몇 해 동안 그 옷을 입고 일했습니다.
두 사람은 축의금으로 자전거 두 대를 사서 신혼여행을 다녔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같은 실험실에서 함께 일했습니다. 헛간을 개조한 곳이었고 비가 새고 겨울에는 추웠습니다. 그곳에서 몇 톤의 광석을 손으로 저어 라듐을 분리해 냈습니다.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이 결정되었습니다. 처음에 후보로 올라간 것은 피에르와 다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피에르가 위원회에 편지를 써서, 마리의 이름이 빠진 상은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세 사람이 함께 받았습니다.
1906년 4월
피에르가 비 오는 날 길을 건너다 마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흔여섯이었습니다.
마리는 그해부터 검은 표지의 일기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남편에게 말을 거는 형식이었습니다. 오늘 무엇을 했는지, 아이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실험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그에게 보고하듯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맡던 소르본의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그 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였습니다. 첫 강의를 그는 피에르가 멈춘 자리에서 시작했습니다.
마리는 193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래 방사선을 다룬 것이 원인으로 여겨집니다. 그가 쓰던 실험 노트는 지금도 방사능이 남아 있어 납 상자에 보관합니다. 열어 보려면 서약서를 써야 합니다.
그는 무엇을 했나
- —폴란드로 돌아갈 계획 때문에 처음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그해 여름 실제로 폴란드로 돌아갔다.
- —이듬해 파리로 돌아와 혼인했고, 예식과 살림을 최소한으로 했다.
-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맡던 자리를 이어받았다.
두 사람은 함께 연구했고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1906년 피에르가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마리는 남편이 죽은 뒤 그에게 말을 거는 형식의 일기를 썼습니다. 그 일기는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기록이 말해주는 것
- 확인됨마리 스크워도프스카와 피에르 퀴리는 1894년 파리에서 만났고 1895년 혼인했습니다.(The Nobel Prize — Marie Curie, Biographical)
- 확인됨두 사람은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The Nobel Prize — Marie Curie, Biographical)
- 확인됨1906년 피에르 퀴리가 파리에서 마차 사고로 사망했고, 마리가 그의 교수직을 이어받았습니다.(The Nobel Prize — Marie Curie, Biographical)
- 해석마리가 첫 청혼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로는 폴란드로 돌아가려던 계획이 널리 언급됩니다.(Encyclopædia Britannica — Marie Curie)
기록이 말하지 않는 것
- 미상마리가 파리로 돌아오기로 마음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 미상두 사람이 서로에게 언제부터 연애 감정을 가졌는지는 기록으로 특정할 수 없습니다.
- 미상피에르가 폴란드로 가겠다고 한 것이 어느 정도의 결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록이 없는 부분은 채우지 않습니다. 인용이나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 한, 이 사람이 무엇을 느꼈는지는 쓰지 않습니다.
출처
- 2차 · The Nobel Prize — Marie Curie, Biographical · 전기적 사실 확인에만 사용했습니다.
- 2차 · Encyclopædia Britannica — Marie Curie · 전기적 사실 확인에만 사용했습니다.